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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아버지는 누구인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04-05-01 18:58:44
조회수 2,029 분류 일반 
- 아버지는 누구인가? - (이전 홈페이지 글을 5월을 맞아 옮겨 놓습니다)

아버지란 기분이 좋을 때 헛기침을 하고 겁이 날 때 너털웃음을 웃는 사람이다.
아버지란 자기가 기대한 만큼 아들딸의 학교 성적이 좋지 않을 때, '괜찮아, 괜찮아' 하면서도 속으로는 몹시 화가 나는 사람이다.

아버지의 마음은 먹칠을 한 유리로 되어 있다. 그래서 잘 깨지기도 하면서 속은 잘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란 울 장소가 없기에 슬픈 사람이다. 아버지가 아침 식탁에서 성급하게 일어나서 나가는 장소(그 곳을 직장이라고 한다)에는 즐거운 일이 기다리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아버지는 머리가 세 개 달린 용과 싸우러 나간다. 그것은 피로와 끝없는 일과 직장 상사에게 받는 스트레스다.

아버지란 "내가 아버지 노릇을 하고 있나? 내가 정말 아버지다운가?" 하는 자책을 날마다 하는 사람이다.

아버지란 자식을 결혼시킬 때 한없이 울면서도 얼굴에는 웃음을 나타내는 사람이다. 아들딸이 밤늦게 돌아올 때에 어머니는 열 번 걱정하는 말을 하고 아버지는 열 번 현관을 쳐다본다.

아버지의 최고의 자랑은 자식들이 남의 칭찬을 받을 때이다.

아버지가 가장 꺼림 직하게 생각하는 서양 속담이 있다. 그것은 '가장 좋은 교훈은 손수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라는 속담이다. 아버지는 늘 자식들에게 그럴 듯한 교훈을 하면서도 실제 자신이 모범을 보이지 못하기 때문에 이 점에 있어서는 미안하게 생각도 하고 남 모르는 열등감도 가지고 있다.

아버지는 이중적인 태도를 곧 잘 취한다. 그 이유는 아들딸이 나를 닮아 주었으면 하고 생각하면서도, 나를 닮지 않아 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동시에 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에 대한 인상은 나이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나 그대가 지금 몇 살이든지 아버지에 대한 현재의 생각이 최종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일반적으로 나이에 따라 변하는 아버지의 인상은 다음과 같다.

4세 때 : 아빠는 무엇이나 할 수 있다.
7세 때 : 아빠는 아는 것이 정말 많다.
8세 때 : 아빠와 선생님 중 누가 더 높을까?
12세 때 : 아빠는 모르는 것이 많아.
14세 때 : 우리 아버지요? 세대 차가 나요.
25세 때 : 아버지를 이해하지만 기성 세대는 갔습니다.
30세 때 : 아버지의 의견도 일리가 있지요.
40세 때 : 여보, 우리가 이 일을 결정하기 전에 아버지의 의견을 들어봅시다.
50세 때 : 아버지는 훌륭하신 분이었어.
60세 때 : 아버지께서 살아 계셨다면 꼭 조언을 들었을 텐데....

아버지란 돌아가신 뒤에도 두고두고 그 말씀이 생각나는 사람이다. 아버지란 돌아가신 후에야 보고 싶은 사람이다. 아버지는 결코 무관심한 사람이 아니다.

아버지가 무관심한 사람처럼 보이는 것은 체면과 자존심과 미안함 같은 것이 어우러져서 그 마음을 쉽게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들딸들은 아버지의 수입이 적은 것이나 아버지의 지위가 높지 못한 것에 대해서 불만이 있지만 아버지는 그런 마음에 속으로만 운다.

아버지는 가정에서 어른인 체를 해야 하지만 친한 친구나 맘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면 소년이 되고 만다

아버지, 뒷동산의 바위와 같은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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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 아버지 (2002.10.24 조선일보)

아버지는 한겨울 돈 벌러 집나간 딸을 사흘 만에 데려와 뜨스운 아랫목에 앉혔다. 그리고 말했다. “넌 내 딸 아니다. 나가라.” 아버지는 데모판만 쫓아다니는 아들의 종아리를 내리쳤다. 얼굴이 벌개진 아들은 콧김만 센데, 울안을 돌아간 아버지는 소리 죽여 우셨다. “…아버지의 마음은 먹칠한 유리로 돼 있네. 잘 깨지기도 하지만 속은 보이지 않는다네. 아버지란 울 장소가 없기에 슬픈 사람이라네…”

뒷부분은 올 가을 사이버 공간을 적셔놓고 있는 ‘아버지는 누구인가’라는 산문시 일부다. 자식들의 눈에 아버지는 늘 이중 인격자다. “…아버지는 어머니 앞에서는 기도도 안하지만 혼자 차를 몰면서는 큰소리로 기도도 하고 주문을 외기도 하는 사람이다. … 아버지란 기분이 좋을 때 헛기침하고 겁이 날 때 너털웃음 웃는다. …아버지란 자식을 결혼시킬 때 한없이 울면서도 얼굴에는 웃음을 머금는 사람이다. …아들 딸이 밤늦게 돌아올 때 어머니는 열번 걱정하는 말을 하지만 아버지는 열번 현관을 쳐다본다.”

그 ‘아름다운 이중성’을 빅토르 위고는 시 ‘부성(父性)’에서 이렇게 읊었다. “영웅의 꿈은 세상 밖에서 위대하고, 집안에서 작아지는 것이라네.” ‘향수’의 시인 정지용에게 아버지 모습은 좀더 아련하다.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어제 발표된 ‘청소년 보호백서’를 보니 고교생 중 22%가 ‘아버지와 대화하는 시간이 하루 1분 미만’으로 나왔다. 대부분 “1분도 안되다니!”라고 걱정이겠지만, 어떤 세대에게는 ‘1분도 과분했던’ 그 시절이 떠오를 것이다. 이젠 자식뻘 또래에게 아첨해야 그나마 행세할 수 있는 세상이다.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고 자화상을 그렸던 미당(未堂)이 그 세상을 버린 지도 벌써 이태가 돼간다.

카프카가 죽기 직전 남긴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에서 아버지는 폭군적인 아버지상(像)의 전형이었다. 그로부터 한 세기가 흐른 오늘날은 1주일에 10시간30분을 인터넷에 붙잡혀 있는 자식들에게 아비가 말걸기도 쉽지 않다. 김정현의 ‘아버지’, 조창인의 ‘가시고기’ 같은 작품이 벼랑으로 내몰리는 작금의 부성을 위로하고 있긴 하지만…. 하기사 요즘 ‘훌륭한 아빠가 되자는 모임’은 수없이 많아도 ‘훌륭한 딸·아들 되려는 모임’은 눈을 씻고 봐도 없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