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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그리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04-05-05 13:28:50
조회수 1,923 분류 일반 
( ** 통신회사에 근무하는 이혜영씨의 글을 옮겨 싣습니다)

그날은 비가 많이 오는 날이였어요.
그 날 따라 불만 고객들이 유난히 많아 은근히 짜증이 나기도 했지요.
하지만 업무의 특성상 서비스업이기 때문에 고객이
소리를 지르거나 욕설을 해도 저희 쪽에서 할 수 있는 말이란 ...

"죄송합니다. 더 나은 서비스를 위해서 ... 다시 조치하겠습니다."
이런 말 외에 같이 흥분하거나 소리를 지를 수는 없거든요.

그날도 비까지 오는 데다가 컨디션도 많이 안 좋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제 사정이기 때문에 걸려오는 전화에
제 기분은 뒤로 숨긴 채 인사 멘트를 했죠.
목소리로 보아 어린 꼬마여자였어요.

이혜영 : 정성을 다하겠습니다. XX 텔레콤 이혜영입니다.

고 객 : 비밀번호 좀 가르쳐주세요..

(목소리가 무척 맹랑하다는 생각을 하며)

이혜영 : 고객 분 사용하시는 번호 좀 불러 주시겠어요 ?

고 객 : XXX-XXXX 이요.

이혜영 : 명의자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고 객 : 난 데요. 빨리 불러 주세요.

(어린 꼬마 애가 엄청 건방지군)

이혜영 : 가입자가 남자 분으로 되어 있으신데요 ? 본인 아니시죠 ?

고 객 : 제 동생이예요. 제가 누나니까 빨리 말씀 해주세요.

이혜영 : 죄송한데 고객 분 비밀번호는 명의자 본인이
            단말기 소지 후에만 가능하십니다.
            저희 밤 열시까지 근무하니 다시 전화 주시겠어요 ?

고 객 : 제 동생 죽었어요. 죽은 사람이 어떻게 전화를 해요 ?

(가끔 타인이 다른 사람의 비밀번호를 알려고 이런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에 전 최대한 차가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혜영 : 그럼 명의변경을 하셔야 하니까요, 사망진단서와
            전화주신 분 신분증 또 미성년자이시니까 부모님동의서를
            팩스로 좀 넣어 주십시오.

고 객 : 뭐가 그렇게 불편해요. 그냥 알려줘요.

(너무 막무가네였기 때문에 전 전화한 그 꼬마 애의 부모님을 좀 바꿔달라고 했죠.)

고 객 : 아빠 ! 이 여자가 아빠 바꿔 달래.

(그 꼬마 애의 뒤로 아빠와 엄마 그리고 그 가입자의 말소리가 들리더군요.)

"비밀번호 알려 달라고 그래. 빨리."

아 빠 : 여보세요.

이혜영 : 안녕하세요. XXX 텔레콤인데요.
            비밀번호 열람 때문에 그런데요,
            명의자와 통화를 할 수 있을까요?

아 빠 : 제 아들이요 ? 6개월전에 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콰당 ! 그럼 사실이란말야 ?)

그 때부터 미안 해 지더군요.
아무 말도 못하고 잠시 정적이 흐르는데 아빠가 딸에게 묻더군요.

아 빠 : 얘야. 비밀번호는 왜 알려고 전화했니 ?

딸 : (화난 목소리로)
엄마가 자꾸 혁이(동생 이름이 혁이 였거든요) 호출번호로 인사말 들으면서 계속 울기만 하잖아.
그거 비밀번호 알아야만 지운단 말야.

(전 그때 가슴이 꽉 막혀 왔습니다.)

아 빠 : 비밀번호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혜영 : 아 ? 예 ... 비밀번호는 명의자만 가능하기 때문에
            명의변경하셔야 합니다.
            의료보험증과 보호자 신분증 넣어 주셔도 가능합니다.

아 빠 : 알겠습니다.

(전 감사합니다로 멘트 종료를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저도 모르게 ...)
이혜영 : 죄송합니다. 확인후 전화주십시요.

아 빠 : 고맙습니다.

이혜영 : 아 ... 예 ...

그렇게 전화는 끊겼지만 왠지 모를 미안함과 가슴 아픔에
어쩔 줄 몰랐죠.

전 통화종료 후 조심스레 호출번호를 눌러봤죠. 역시나.

"안녕하세요. 저 혁인데요.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식으로 멘트가 녹음되어 있더군요.

전 조심스레 그 사람의 사서함을 확인해 봤죠.
좀 전에 통화한 혁이라는 꼬마 애의 아빠였습니다.

"첫 번째 메시지입니다."
"혁아.. 아빠다. 이렇게 음성을 남겨도 니가 들을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오늘은 니가 보고 싶어 어쩔 수가 없구나.
안춥니? 혁아 ... 아빠 안 보고 싶어 ?"

가슴이 메어 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날 하루을 어떻게 보낸 건지.

아마도 그 혁이의 엄마는 사용하지도 않는 호출기 임에도 불구하고
앞에 녹음되어 있는 자식의 목소리를 들으며 매일 밤을 울었나 봅니다.
그걸 보다 못한 딸이 인사말을 지우려 전화를 한거구요.

가슴이 많이 아프더군요. 일 년이 훨씬 지난 지금이지만
아직도 가끔씩 생각나는 잊혀지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 부모는 죽어 산에 묻고 자식은 죽어 부모 가슴에 묻는다 -
- 너희가 부모 마음 알기나 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