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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우리의 외할머니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04-05-03 14:14:03
조회수
2,258
분류
일반
- 사랑하는 우리의 외할머니 -
* 외할머니(1)
얼마 전 영화 ‘집으로…’가 잔잔하게 관객의 심금을 울렸다. 도시에서 자란 손자가 산간벽지 외할머니를 만나 충돌하다가 조금씩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을 그렸다. 김치를 찢어 밥 위에 얹어주는 할머니에게 손자놈은 입을 삐죽이며 앙탈한다. 마른 가슴팍을 버릇없이 밀친다. 못된 손자놈이지만 외할머니의 인내에는 한계가 없다. 이 영화는 외할머니에 대한, 다 큰 손자들의 죄책감과 쓸쓸함을 건드렸다. 감독은 ‘이 땅의 모든 외할머니께 바친다’고 헌사했다.
옛날 우리들 외할머니의 속내 저 밑바닥에는 ‘딸 낳은 죄인’이란 앙금같은 원죄의식이 깔려 있는지도 모른다. 언제나 반쯤 돌아서서 고개를 숙이고 서 계셨던 이유였을 것이다. 그 외할머니에겐 항상 붙어다니는 물건들이 있었다. 요강, 수박통 만한 보퉁이, 달걀 한 꾸러미, 자장가와 도시락, 약손, 은비녀, 굽은 등, 순하디 순한 강아지 한마리, 삼베 손수건, 손부채…, 그리고 한없는 사랑과 고독이다.
최근 독일 카셀대학 심리학과 교수가 양가 조부모 4명이 모두 생존해 있는 2000명을 설문조사했다. ‘가장 친근하고 영향력을 많이 준 친척’으로 700명이 외할머니를 꼽았다고 한다. 이 조사를 온 지구촌으로 확대해도 결과가 크게 다르지 않을 듯하다. 우리도 전국을 돌아보면 ‘친할머니집’이란 음식점은 드물어도, 순두부 뚝배기 혹은 민박집에 ‘외할머니집’은 어떤 동네든 빠지지 않고 눈에 띈다.
외할머니 얘기는 무궁무진하다. 주요섭의 ‘사랑 손님과 어머니’에서는 엄마를 골려주려 벽장 안에 숨는 옥희에게 외할머니가 아빠를 대신하는 정신적인 가장이다. 납북 일본 여인과 북한 남자 사이에 태어난 15세 김모양도 최근 인터뷰에서 “일본에 계신 외할머니가 보고 싶다”고 했다던가. 한 여자대학의 아동학과 교수는 ‘외할머니 육아법’이란 책을 내고 말했다. “세계 석학의 이론을 연구했지만 결국 내 아이를 키울 때는 위대한 사상가도 아니고 이론가도 아닌 내 어머니의 교육법을 따르게 되더군요.”
독일 카셀대학 연구와 함께 영국 런던대학, 미국 워싱턴대학에서도 외할머니에 대한 연구가 나왔다. 외할머니 손에 자라면 영아사망률이 절반으로 줄어든다는 것이다. 이것은 특정 국가에만 적용되는 얘기가 아니다. 하기야 소를 잘 키우기 위한 이론에도 ‘외할머니 효과’라는 말이 나온다. 할미소는 어미소의 모성 능력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처가(妻家) 근처에 신접살림을 꾸미는 세대가 갈수록 늘어나는 최근 추세도 그래서 수긍이 가고….
* 외할머니(2) - NYT “동거 손자들 사망률 절반수준”
인류학자들에 의해 무시돼 왔던 외할머니의 존재가 유아 사망률을 절반으로 줄일 만큼 인간 발전과 행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으로 분석됐다.
뉴욕타임스(NYT)는 5일 ‘외할머니의 힘’이라는 제목으로 “최근 국제 학술회의에서 연구 발표자들은 외할머니나 여성 연장자들이 가정에 미치는 영향력이 과소 평가되어 왔다는 데 의견 일치를 보았다”면서 이같이 보도했다.
NYT는 런던대 인류학과 레베카 시어(Sear) 교수와 루스 메이스(Mace) 교수의 1950~1974년 사이 잠비아 시골 지역 인구통계 분석 자료를 인용, 외할머니와 사는 아이들의 사망률이 그렇지 않은 아이들의 절반 수준이었다고 전했다. 반면 친할머니와 아버지의 존재는 영아 사망률에 별로 영향을 안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독일 카셀대 심리학과의 해럴드 율러(Euler) 교수도 독일인 2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7세까지 양가 조부모 4명이 모두 생존해 있던 700명의 응답자 자료를 분석했더니 절반 이상이 가장 친근한 인물로 외할머니를 꼽았으며, 12~14%만이 친할머니라고 응답했다고 발표했다.
연구학자들은 “외할머니의 영향력이 큰 것은 인류 발전 과정에서 부계(父系)의 영향력이 불확실하거나, 여성들은 자신의 어머니(외할머니)에게 아이들을 돌봐달라고 부탁하기가 훨씬 수월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NYT는 “문화인류학자들 사이에 인류 선사시대를 이해하는 데 외할머니가 중요한 요소라는 인식이 높아지면서 외할머니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 외할머니(3)
외할머니와 동거하는 어린이의 사망률이 그러지 않는 어린이에 비해 절반이나 낮았다는 보도를 접하고 보니 어릴 적에 배 아프면 외할머니 불러 배를 문지르고, 심하게 앓으면 외할머니에게 맡겨졌던 일이 생각난다. 엄마 손은 약손, 엄마 입김은 약김이라 하지만, 가난했던 삼남(三南) 산간 지방인지라 엄마가 바쁘기 때문에 외할머니 손을 빌리는 줄 알았는데 반드시 그런 이유만은 아님을 시사하는 외할머니의 힘이다. 엄마 손보다 외할머니 손이 약손인 까닭은 뭣일까. 손으로 환부를 어루만지면 플라세보 효과라 하여 의사(擬似)치유 효과를 내기도 하고 손에서 발산되는 동물 자기(磁氣)의 작용으로 낫게 한다고도 한다.
그 무엇보다 설득력을 갖는 것은, 아기들이 정신적·육체적으로 가장 안정되고 편안함을 갖는 상태는 어머니와 체온이 같게 유지될 때인데, 그래서 심신의 불안·부조(不調)를 바르게 하는 등온(等溫) 효과를 위해 손으로 배를 문지르고 호호 입김을 분다는 것이다. 아기들이 태어나자마자 우는 것을 두고 셰익스피어는 바보들만 사는 세상에 강제로 떠밀려 나온 것이 억울해 운다고 했지만, 자궁 속에서 유지돼 왔던 엄마와의 등온로부터의 이탈 때문에 우는 것이다. 그 어머니의 체온에 가장 가까운 것이 어머니의 어머니요, 따라서 거부반응이 극소화된 등온 유지 대상이 외할머니이기에 아이가 아프면 외갓집에 맡겼을 것이다.
만나면 아무 말 하지 않고 숨만 쉬고 있어도 편안한 사이를 허물없다고 한다. 허물이 없다는 것은 예의·격식·도덕·규범이나 장유·남녀·반상·빈부 그리고 이해가 개재하지 않은 원초적으로 가장 편안한 사이다. 그런 사람과 더불어 있으면 허물 때문에 생기는 긴장·스트레스 등 심신의 부조(不調)로부터 해방된다. 가장 허물없는 사이가 어머니와의 사이요, 잘잘못 가리지 않고 감싼다 하여 포용(包容) 원리라 하고 아버지는 잘잘못을 맺고 자르며 거리를 둔다 하여 단절(斷切) 원리라 한다. 위기를 당했을 때 아버지를 부르지 않고 어머니를 부르는 이유가 바로 허물 잡는 거리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에게도 버릇을 잡는 단절 원리가 잦다보니 보다 허물이 없는 차선적 사이로 외할머니가 뜰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단절은 없고 포용만 있는 외할머니와 더불어 있으면 누구보다 심신이 편하기에 병에 잘 걸리지 않고 걸려도 잘 낫기에 사망률도 반감했을 것이다.